덜 유명해도, 스토리는 더 흥미진진
이 만화를 <굿바이 미스터 블랙>과 비슷한 시기에 읽었는데, 인지도가 더 높은 <굿바이 미스터 블랙>보다 <아뉴스데이> 쪽이 훨씬 스토리 흥미진진하고 인상 깊었다. 여러 면에서...
이웃 동네 만화 중에서도 이케다 리요코의 '유명'작 <베르사유의 장미>에 비해 <오르페우스의 창>이 보다 완성도 있고 창작물로서의 재미가 더 뛰어나서 의아해 했던 적이 있다. 다른 계열 뿐 아니라 '만화계에서도 유명세나 인지도 같은 건 극의 실질적 재미와는 별 상관없는 경우가 종종 있네' 싶은 마음 올라온다.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쪽이 스토리 훨씬 흥미진진한 경우'가 자주 발견되니 말이다.
<아뉴스데이>의 경우, '에로우스'를 비롯한 남자 주인공들이 멋있고 '마커스-아르벨라의 러브 스토리'도 비극적이면서 아련함이 많이 가미된 훌륭한 서사를 보여줘서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약소국의 아름다운 남매
강대국 '로마'의 황제가 바뀌면서 조공 꼬박꼬박 바치던 약소국 '다키아'에 대한 정복 정책을 펼쳐, 이 나라의 왕과 왕비는 왕자와 공주를 피신시킨 뒤 죽음을 맞게 된다.
<아뉴스데이>처럼 이런 류의 '약소국이라 희생 당하는 나라의 왕족 자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정 만화로 황미리의 <왕가의 후예>나 김영숙 <사랑의 아그네시카>, 타케미야 케이코 <파라오의 무덤>=김숙의 <사리오키스>, 한승원 김동화 작가의 <아카시아> 등이 있다.
강대국의 품위 있는 남매
다키아의 왕족 남매인 에로우스와 아르벨라는 피신 중 헤어지게 되고, 각각 붙잡혀 로마의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데... 도망 중 부상 입고 쓰러진 아르벨라를 발견한 고귀한 인품의 로마 귀족 베아트리체는 그녀가 '다키아의 공주'인 걸 알면서도 국가에 고해 바치지 않고 자신의 집에 노예로,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준다.
남편이 전사하여 미망인이 된 베아트리체는 로마가 자신의 나라이긴 하지만 '로마의 정복 전쟁'은 정말 싫다고 말하며, 그것의 희생양이 된 '다키아의 공주 아르벨라'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한 마음을 갖고서 그녀를 대한다.
적국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
누나 베아트리체의 집에 들렀다가 노예 아르벨라를 발견한 로마의 장군 마커스는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반하여 자신의 거처로 데려온다.
그가 다키아 정벌 때 사령관으로 와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자라는 걸 알게 된 아르벨라는 '나라의 원수, 부모의 원수'라 여기며 기회 봐서 마커스를 해치겠다 다짐하지만, 수시로 그를 향해 험한 말을 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엔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베아트리체의 대변처럼 '마커스는 로마식 교육을 받고 성장했으며, 국가의 명령을 최고로 알면서 조국인 로마를 사랑해서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유능한 장군'일 뿐이며, 이 남매의 기본적인 인품은 훌륭하고 그 역시 아르벨라가 '적국의 공주'임을 알면서도 국가에 고하지 않고 끊임없는 사랑을 주고 그녀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작중 '미모'는 하프를 켜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로마의 노예로서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로 활약하는 다키아의 왕자 에로우스가 뛰어난 편인데, '애정 서사'는 그의 여동생인 아르벨라와 적국인 로마의 장군 마커스 쪽 스토리가 애절하고 흥미진진한 편이다.
마커스 누나와 어린 조카의 아련 엔딩
후반부로 갈수록 '누명 쓰고서 조국으로부터 버림 받은 뒤, 기억 잃은 채 2년 동안 섬에서 살다가 지위 회복하여 로마로 돌아온 마커스' 캐릭터의 비중이 꽤 큰 편이다.
마지막 부분, 동생의 붕어빵 아들과 만나게 되었지만 그 조카에게 진실을 전하지 못한 채 회한에 잠기는 베아트리체 엔딩도 먹먹하고 아련해서 인상적이었다. 철저하게 비극적인 작품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나게 잘 읽히고, 미나 작가의 이후에 나온 만화들에 비해 초기작임에도 그림체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었다.
<아뉴스데이>를 떠올리게 만든 다른 만화들
적국의 사람이지만, 맨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서 한쪽 혹은 양쪽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설정은 <아뉴스데이> 뿐 아니라 <바사라> <파라오의 무덤=왕자 사리오키스> 등의 만화에도 나온다.
<아뉴스데이> 초반에 황제 앞에서 노래하길 거부했던 에로우스를 길들이겠다며 데려간 로마의 사제장 메두사가 그의 이름과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고문하라 시키는데, 고문관이 그의 아름다움과 의연한 태도, 왠지 모를 기품 등에 반하여 에로우스를 도우려 한다.
심한 고문으로 죽게 하고 싶지 않다며 메두사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름 '리비우스'라고 그의 이름을 둘러대는데, 다음 해에 나온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에도 '고문관이 죄수가 된 남자 주인공에게 반하여 도와주는 설정'이 나오는 걸 보면 황미나 작가의 <아뉴스데이>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복자 나라의 인물들에게도 슬픈 사연이..
길들이겠다고 데려가 그를 위험한 검투장으로 밀어 넣었지만 '아름다운 미청년' 에로우스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이전의 자신과는 달리 약한 모습 보이는 나이 든 중년 여성 메두사, 적국인 로마의 공주로서 에로우스에게 반해 그의 탈출을 돕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율리아 등 이 만화는 침입자-정복자 나라의 캐릭터들도 각각의 사연 있게 잘 묘사된 작품이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채 살아 돌아온 마커스가 '독립 전쟁을 벌이던 다키아'에 사령관으로 나서서, 너무나 유능한 그였기에 2차 정복에 성공하여 사랑하는 여인 아르벨라와 그의 오빠를 다시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비극적인 커플의 먹먹 엔딩
그들이 처형장으로 향해 가는 그 순간에서야 마커스의 기억이 돌아와 남매의 탈출을 돕지만 결국 세 주인공 모두 죽음으로 치닫는 그 과정이 극적으로 잘 표현되었고, 비극적 결말 안 좋아하는 독자임에도 <아뉴스데이>의 비극적인 결말은 무척 아련하고 먹먹한 느낌을 주기에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만화'란 생각에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키 크고 성숙한 타입이라 10대 소녀 치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장면들 있지만, 그래도 마커스가 첫눈에 반할 만큼 아르벨라가 무척 아름답긴 하다.
제목 '아뉴스데이'의 뜻, 주의 어린 양
적국의 장군에게 점점 끌리는 마음과 다키아 멸망 당시의 일로 심란해 하던 아르벨라가 시녀를 따라 당시의 로마에선 금지되어 있던 '크리스찬 집회'에 나가게 되는데, 종교가 생긴 그녀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라틴어 <아뉴스데이>가 작품의 제목으로 쓰인 것 같다. Agnus Dei(아뉴스 데이).. '주의 어린 양'이란 뜻이다.
Agnus Dei : 주의 어린 양
Quitollis Pecata nundi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Miserere nobis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Agnus Dei : 주의 어린 양
Quitollis Pecata nundi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Dona nobis pacem :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죽음조차 그들을 갈라놓지 못했기에 '불행으로 보였던 행복한 연인들', 이 적국 남녀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발매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시 읽어도 아련한 감성으로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아름다워서 더 기억나는 제왕, 에로우스
<글래디에이터> 같은 영화에선 좀 더 체급이 있는 검투사가 등장하지만, 만화 <아뉴스데이> 속 '아름다운 제왕 에로우스'는 2014년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 나오는 검투 노예 주인공처럼 덩치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뛰어난 검 실력과 날랜 동작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몸이 가볍고 점프력이 좋은 검투사'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입하여 멸망시키고 정복하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과거의 역사 속에선 그런 일들이 많았고 그런 서사를 다룬 역사물(창작물)에서 아련한 느낌을 주는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지만, 현실 속에선 더 이상 국가 간의 침입과 복속은 없었으면...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