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녀 비극의 발단 원인자는 '라메세스'
히타이트 왕자 '리우스'와 결혼을 앞둔 리비아의 '아카시아'는 그 미모가 이웃 나라에까지 소문난 아름다운 왕녀이다. 그 이웃 나라가 강대국 이집트이며, 그곳엔 결혼을 앞둔 또다른 커플 '라메세스'와 '페드라'가 있다.
'페드라'는 원래 리비아 정복까진 바라지 않았으나, 소문난 미녀 '아카시아'가 좀 궁금했던 이집트 왕 '라메세스'는 "걔가 이뻐봤자 이집트 왕녀인 페드라 너보다 이쁘겠어?" 이런 심리로 굳이 그곳으로 쳐들어가게 된다. 막상 실물 확인하니 주인공 '아카시아'가 '라메세스' 예상보다 많이 예뻤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아름다움에 반한 그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노예로 데려오게 된다.
이후, 미인 좋아하는 이집트의 파라오 '라메세스'가 약혼자인 '페드라'를 제끼고 약소국 리비아를 정복하고서 데려온 '아카시아'를 왕비로 삼으려고까지 하는데...(아카시아는 물론, 자기네 나라 정복자인 라메세스 싫어함) 여기서 네 남녀의 비극이 시작된다. 애초에 '약혼녀까지 뜯어 말리는 리비아에 대한 정복 전쟁'을 '라메세스'가 단행하지 않았다면 넷 모두에게 벌어지지 않았을 비극이 말이다...
한을 품고 죽어간 전생의 '아카시아'
부모대에서 서열이 높은 건 페드라 자매의 아버지였는데, 그 언니인 네트라가 '신관' 노릇을 하며 사촌 남동생인 라메세스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본인이 무척 아끼는 여동생은 왕비가 되기로 한 것이었고... 그랬던 라메세스가 미모만 밝히며 이웃 나라 아카시아를 왕비로 삼으려 하자, 분노한 자매는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서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처형하게 된다.
정혼자가 노예로 끌려간 사실을 알게 된 히타이트 왕자 리우스는 아카시아를 구하기 위해 이집트 병사로 위장하여 궁에 잠입하였다. 그가 히타이트 군사들까지 동원한 탈출 계획을 세웠으나, 일이 틀어져 본국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 악녀 페드라에 의해 둘 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다수의 시대물 순정 만화에서 그러하듯 <아카시아>에도 '파라오의 마음을 앗아간 망국의 노예 아카시아'에 대한 '악녀 페드라'의 채찍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그런 류의 고초를 겪다가, 사랑했던 히타이트 왕자 리우스는 홀로 이집트 병사들과 싸우다 사망하고 아카시아 자신은 페드라에 의해 물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쏟아지는 물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아카시아는 결국 한을 품은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것이 끝이 아닐 거라 여기며.. 언젠가, 자신과 리우스의 한에 대해 복수하리라 맹세하며.. 악녀 페드라를 저주하면서 말이다.
이 만화가 '환생물'이니까, 여기까지 읽으면 보통 '아, 전생의 인물들이 환생한 뒤 주인공 아카시아가 후생에서 페드라에게 복수하는 내용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아카시아>를 끝까지 다 읽어보면 그 생각을 완전히 비켜가는 내용이 등장한다.
'반전'적 설정 : 그랬던 전생의 그녀는 후생에서 복수 1도 안해
4,000년 뒤 <아카시아>의 네 남녀는 현대의 미국에서 환생하게 된다. 전생에서의 엄청난 인연으로, 이 후생에선 넷 모두 고대 시대 때와 '이름'도 또옥~같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던 어느날, 배우인 엄마 촬영장에 따라갔다가 청순한 미모가 눈에 띄어 '비누 모델'로 발탁된 청소년 아카시아 앞에 이미 아역 배우로 성공한 뒤 스타가 되어있는 페드라가 나타난다.
(실제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본인 '전생의 인연'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현대의 미국인으로 태어난 아카시아가 '물을 두려워 한다'든가 '아빠 친구 아들인 리우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된다'든가 하는 이전 생의 영향이 살짝 있긴 하지만, 대체로 거기까지다.
전생에선 여주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나름의 명분이 있었지만, 후생에선 '저거 공감 능력 하나도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페드라의 악행력이 한층 강해졌다.
신선한 얼굴인 아카시아가 연예계에서 슬슬 인기 끌려하자 노골적으로 싫어하면서 그녀가 성장하지 못하게 이런저런 방해 공작을 펼치던 페드라.. 나중엔 노선을 확 변경하여, 앞에선 착한 척하고 뒤에선 틈만 나면 아카시아를 다치게 하거나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주인공인 아카시아는 극이 끝날 때까지 모르고, 페드라가 아카시아 죽이려다 자기 꾀에 넘어가 사망하게 되었을 때에도 '페드라 좋은 애였는데..' 하면서 슬퍼한다는 거.
앞에선 친절한 척 굴었던 상대방의 가식적인 면모에 넘어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악녀'임을 인식조차 못하는 여주인공 아카시아는 페드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전생' 마지막 타임에서와 달리 '현생'에선 복수 1도 하지 않고 그저 해맑은 태도로 일상을 보내게 되는데...(그래,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거야) 이 순정 만화에서 번번히 페드라의 계획을 간파하고서 아카시아가 다치지 않게 몰래 지켜주는 건 라메세스이다.
피해자의 편안함이 보장되는 전자동 복수
대다수의 복수극에선 악당이나 악녀가 주인공을 괴롭히면, 내내 당하던 주인공이 나중엔 흑화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먹이거나 상대방을 응징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순정 만화 <아카시아>의 경우, 상대(악녀)가 자신에게 나쁜 짓 한지조차 모르는 주인공이 등장하며 '당사자는 가만 있어도 되는 자동 복수극'이 펼쳐진다.
전생에서처럼 아카시아의 미모에 반한 라메세스가 현생에 와선 조건 없이 그녀를 사랑하면서 페드라의 위협으로부터 몰래 지켜주고, 아프리카 로케 때 '약물'과 '뱀'을 이용하여 아카시아를 죽이려 했던 페드라가 실수로 본인이 되려 '뱀'한테 당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등 전생에서 '복수할거야!' 했던 아카시아가 현생에선 아무런 마음 고생이나 수고를 하지 않았음에도 악녀한테 알아서 복수가 가해지는 편리함(?)이 이 만화 스토리엔 존재한다.
현생에서 재벌(악덕 기업) 대표 동생인 페드라와 그 사촌인 라메세스는 이미 잘나가는 배우였고, 아빠 친구 딸이자 여친인 아카시아를 방송국에 데려다 준 뒤 관계자 눈에 띈 미소년 리우스는 아카시아와 마찬가지로 신인 연기자가 되어 넷이 함께 2~3편의 드라마를 찍게 된다.
악행력 업그레이드, 차원이 다른 악녀
그냥 유망주일 뿐인 아카시아를 업계에서 매장시키기 위해 페드라는 상대방 아빠 회사까지 망하게 하려고 수를 쓰고, 주니어 버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불타는 마을을 마차 타고 지나는 씬' 찍으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멜라니 역 아카시아'를 아가 배우와 함께 불태워 죽이려는 음모를 꾸밀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이 차원 다른 악녀로 나온다.
사촌지간이지만 페드라의 잔혹한 면모에 질린 라메세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카시아를 홀로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데, 전생에 이 '이집트 커플'로 인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리우스와 아카시아는 페드라의 사악한 음모 따윈 전혀 모른 채 현생에선 그저 자기네들끼리 사이 좋게 지내며 마음 편한 일상을 보낸다.
극 전반에 걸쳐 '악행 저지르는 악녀'를 향해 주인공이 별로 하는 일도 없고 상대가 자신에게 해꼬지하려 했단 사실조차 몰라서, 이 만화를 보며 '주인공 캐릭터가 좀 밋밋하다'고 느낀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그런 감이 있긴 한데 '끊임없이 위협 당한 주인공은 본인이 그런 일 당했단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복수심으로 인한 괴로움이나 고뇌도 없어도 되고, 악녀가 있었을 때든 사라진 뒤에든 본인은 쭉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당사자 입장에선 마냥 편하고 좋은 것 아닐까? 이국인들 때문에 전생에선 고생하더니 현생에선 복 받은 삶을 사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전생 사건 발단의 원인자가 '결자해지'하다
네 사람의 전생에선 '리비아 정복 전쟁'을 펼친 라메세스가 리우스와 아카시아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간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 현생에 와서 '굳이 리우스에게서 그녀를 빼앗으려고도 하지 않고, 혼자 좋아하면서 페드라의 위협으로부터 묵묵히 아카시아의 목숨을 지켜준 라메세스'를 보면서 '전생 사건 발단의 원인자가 후생에 와서 결자해지하는 형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 내내 악녀로부터 위협 받던 주인공은 그저 해맑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되고, 전생에서 뜻했던 복수는 현생에 와서 당사자가 가만 있어도 전자동으로 이뤄지다니... 한승원, 김동화 원작 만화 <아카시아> 스토리의 그런 대목이 나한텐 살짝 신선하게 다가왔다.